아래는 이기영 작가의 소설 『고향』에 대해 다룬 글입니다.
농민의 땀과 눈물이 스민 땅, 이기영의 『고향』을 읽고
“나는 왜 돌아왔는가. 여기가 내 고향이긴 한데, 이토록 낯설 수가 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촌. 초가지붕 아래서 흘러내린 땀과 한숨, 그리고 이름 모를 분노와 절망. 오늘 소개할 이기영 작가의 장편소설 『고향』은 단지 한 개인의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조선 민중의 초상이며,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보고다.
작가 이기영과 시대적 배경
이기영(1895~1984)은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한국 근대문학에서 리얼리즘 계열의 대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문학가로 머무르지 않았다. KAPF(조선프로예술가동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일제 식민지 체제와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을 문학으로 풀어낸 지식인이었다. 그의 대표작 『고향』은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시기는 조선의 농촌이 점점 피폐해지던 시기로, 대토지 소유자들의 횡포와 일본 자본의 침투, 만성적인 가난, 그리고 농민 운동의 싹이 움트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이 『고향』 전반에 녹아 있다.
줄거리 요약: 귀향과 낯섦 사이
주인공 ‘희준’은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인텔리다. 그는 고향 마을로 돌아오며 조선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평화롭고 따스한 마을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소작농의 울음소리, 부자 지주의 횡포, 일제의 억압뿐이다.
희준은 고향 사람들에게 계몽과 개혁을 시도하지만, 이미 지친 민중들은 그조차 경계하고 멀리한다. 한때 친구였던 이들도 이미 자본의 논리 속에 포섭되었고, 희준의 사상은 현실 속에서 점점 무력화된다. 그는 농촌을 살릴 방법을 찾으려 애쓰지만, 모든 시도는 벽에 부딪힌다.
결국 희준은 또다시 도시로 떠나게 되고, 소설은 ‘진정한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남긴다.
주요 인물 분석
- 희준: 유학을 통해 계몽주의적 이상을 품은 지식인. 하지만 그 이상은 현실과 충돌하면서 와해된다. 그는 현실의 변화보다는 이상에 머물러 있으며, 결국 고향의 벽을 넘지 못하고 떠나는 인물로 그려진다.
- 만식: 희준의 친구로, 현실적 생존을 선택한 인물이다. 초기에는 가난한 소작농이었지만, 지주의 편에 서며 점차 고향 사람들을 억누르는 쪽으로 변모한다. 그는 ‘배신자’라기보다는, 체제 안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 춘매: 희준이 떠나기 전 좋아했던 여성. 그녀는 고향에 남아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지만, 그 삶은 점점 피폐해진다. 그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인물이다.
주제와 의의
『고향』은 단순히 한 지식인의 귀향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식민지 조선의 농민들이 처한 구조적 현실을 날카롭게 해부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다. 이기영은 극단적 묘사나 감정 과잉 없이, 농민들의 삶을 묵직하게 그려낸다.
1. 고향의 해체
희준이 돌아온 고향은 과거의 정감 어린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착취로 인해 낯선 공간이 되어버린다. ‘고향’이라는 말이 주는 따뜻함이 역설적으로 작품 전체를 차갑게 만든다.
2. 지식인의 한계
희준은 지식인의 이상주의를 대변하지만, 그는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는 당시 많은 계몽주의자들의 좌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3. 민중의 침묵과 절망
민중은 더 이상 쉽게 일어날 수 없다. 그들은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변화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이기영은 이런 무기력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문학사적 평가
『고향』은 1930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농민소설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결정체로 평가받는다. 같은 시기 염상섭, 최서해 등의 사실주의 문학이 개인의 심리나 도시 빈민 문제에 집중했다면, 이기영은 보다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은 농민의 언어와 생활, 풍속, 정치적 억압, 경제적 구조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 농촌의 총체적 초상을 그려냄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를 선명히 제시했다.
나의 감상과 묵상
『고향』을 읽으며 떠오른 감정은 ‘씁쓸함’이었다. 희준처럼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나에게도 있다. 그러나 그 고향은 여전히 현실 속의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은 여전히 존재하며, 민중은 무기력하다. 이기영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다. 지식인은 여전히 이념의 거품 속에 머물고, 대다수는 생존을 위해 꿈을 포기한다. ‘진정한 고향’이란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공동체이지, 과거의 낭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무리하며
『고향』은 그저 한 시절의 기록이 아니다. 이기영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라고 말하고,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간 희준의 발걸음에 우리가 담아야 할 질문을 실었다.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돌아갈 수는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그 머뭇거림이야말로, 이기영이 우리에게 바란 가장 중요한 응답일지도 모른다.
함께 보면 좋은 책
- 염상섭 『삼대』
- 최서해 『탈출기』
- 황석영 『장길산』
추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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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李箕永, 1895년 5월 17일 ~ 1984년 10월 18일)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남북 분단 시대에 걸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이자 사회주의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 농민의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문학을 통해 민중의 삶을 고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생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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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5년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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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동경으로 유학,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 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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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데뷔: 1924년 단편소설 「오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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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체 활동: 1920~30년대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핵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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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행보: 1946년 월북, 이후 북한에서 작가 및 문예 지도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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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984년 평양에서 사망
문학 세계의 특징
이기영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문학을 민중을 위한 무기로 삼고자 한 작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1. 농민 중심의 리얼리즘
이기영의 소설은 대개 식민지 농촌을 무대로 하며, 농민의 빈곤, 착취, 투쟁을 사실적으로 그립니다. 특히 소작농 제도, 지주의 횡포, 식민지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핵심입니다.
2. 계급 의식의 각성
그는 계몽적 지식인과 각성하는 민중 사이의 관계를 자주 다룹니다. 초기에는 계몽주의적 시선을 보이다가, 점차 민중이 스스로 일어서는 방향으로 변모합니다.
3.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기영은 단순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위한 서사를 지향했습니다.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과 맞닿아 있으며, 그의 대표작 『고향』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요 작품
작품명 | 발표 시기 | 내용 및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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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 | 1924 | 일본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인의 비애를 그림 |
『민촌』 | 1927 | 농민의 가난과 고통을 리얼하게 묘사한 중편 |
『고향』 | 1933~34 | 지식인 희준의 귀향을 통해 조선 농촌의 몰락을 그린 장편 |
『서화』 | 1938 | 농민의 조직적 저항과 계급 의식의 형성을 다룸 |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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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민소설의 선구자: 이기영은 일제강점기 농민문학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이후 황순원이나 김정한 등의 농촌문학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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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이념의 접목: 그는 문학을 통해 현실 고발과 사회 개혁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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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F의 중심 인물: 박영희, 임화 등과 함께 KAPF를 주도하며 사회주의 문학을 집대성했습니다.
월북 이후의 삶과 평가
이기영은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북측 문학계에서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정권과 밀착된 문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노동당 문예정책의 대표적 실천자로 기능했고, 문학보다 체제 이념에 가까운 글을 많이 쓰게 됩니다.
이에 따라 한국(남한)에서는 오랜 시간 금기된 인물로 남았지만, 최근에는 이념과 별개로 그의 문학적 성과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정리하며
“문학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기영은 말 그대로 그런 문학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는 우리가 잊고 있던 민중의 얼굴을 되살려냈고, 그들의 땀과 분노를 단어와 문장 속에 영원히 새겨두었습니다.
오늘날 그가 바라던 ‘진정한 고향’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연대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그 자리일 것입니다.
추천 연계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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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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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F 문학 연구서 (한영우, 김윤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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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의 이기영 활동 관련 연구 (북한문학사 자료 참고)